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1차 북벌 (문단 편집) === 국공갈등 === 한편 왕징웨이의 집권 이후 소수에 불과한 공산당의 국민당 잠식이 심해지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후한민]], [[린썬]], [[쩌우루]] 등 국민당 우파의 거두들이 차례로 숙청되자 이에 반발한 국민당 우파는 1925년 11월 [[서산회의]]을 개최하여 독자적인 상하이 당중앙을 설립함으로 국민당은 분열되었고 공산당은 장제스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파들을 상대로 가혹한 처분만을 일삼았다. 거기에 [[천중밍]]을 소탕하는 동정을 성공시킨 장제스의 정치적 위상이 올라가자 공산당은 장제스를 향해서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신임 소련인 고문 키산카는 공공연하게 북벌은 성공할 수 없다면서 장제스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분노한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감, 광저우 위수사령관, 군사위원회 위원 자리에서 사퇴하겠다면서 왕징웨이에게 키산카를 귀국시키라고 촉구했으나 왕징웨이는 뚜렷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한편 장제스가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 키산카는 장교들과 공산당원을 선동, 연일 반장 행동에 나섰다. 장제스를 비방하는 유인물이 나돌았고 정치교관들이 황푸군관학교 내부에도 돤치루이가 한 사람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를 공격하며 생도와 장교들에게 장제스를 타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2월 26일에는 2사단장 왕무공이 키산카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키려 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외유를 기획하기도 했으나 비서 [[천리푸]]가 소련을 다녀오는 사이에 공산당의 음모로 몰락하면 걷잡을 수 없다고 조언하자 배를 타기 직전에 도로 돌아와서 광저우에 잔류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중산함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장제스는 공산당에 큰 타격을 입히고 프랑스로 외유를 떠나버린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라 국민당을 장악하여 원래 목표인 북벌의 추진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소련에서 파견되어 있던 부브노프 사절단은 기존에 파견된 키산카를 비롯한 고문들이 불손한 언동과 북벌 문제에서의 과오를 저질렀음을 시인하고 북벌의 조기 실시가 타당하다고 입장을 선회했으며 파업을 비롯한 과격 행동을 종식하고 광저우 정권을 안정시키며 북벌을 위해 장제스에게 협조하는 것에 동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